![창동리 마을 전경](/images/jp/sub02/sub02_06_01_topbg.jpg)
옛옹기가마터 창동리
옹기점이 있어 점촌이라 일컬어 지는 마을
증평읍 시가지를 관통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신동리와 접경을 이루는 창동리 도로가는 현대식 건물이 빼곡하여 증평의 중심상권임을 보여준다.
![옹기점](/images/jp/sub02/sub02_06_01_img01.jpg)
옹기점
물레, 방망이, 수레, 두개, 근개, 밑가세질 소리 토닥이던 옹기점. 화로, 시루, 물동이, 파내기, 옹배기, 투가리, 항아리 등 옹기장이가 가마불을 이레동안 쉬임 없이 피워내어 옹기를 굽고 나면 옹기장수들은 그것들을 지게에 짊어지고 산 넘어 들 건너로 팔러 다니던 시절은 아득하다.
갖가지 옹기를 짊어지고 옹기 팔러 다니는 옹기장수의 발걸음은 정처도 없어 사람 사는 어느 곳이든, 사람 지나는 어느 길이든 찾아 나선다. 그 시절 옹기장수의 다리품 값은 얼마였을까? 식구들 때 거리 걱정에 허기달래는 국밥 한사발은 고사하고 지게시름 달래는 탁배기 한사발에 김치 한 조각 우적일 수 있었는지...
그 옛날 장터 곁의 옹기점은 먹고살기에는 지장이 없었겠다. 옹기 굽는 가마하나에 옹기를 진열할 점포하나면 그만이었을 옹기점. 기억에서 멀어진지 오래이며 그 터마져 남아있지 않다.
![점촌](/images/jp/sub02/sub02_06_01_img02.jpg)
점촌
증평읍 창동 일대를 증평사람들은 지금도 점촌이라 부른다. 점촌은 오래전부터 옹기점이 있어 일컬어진 마을 이름이다. 옹기점과 가마터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창동 951-9번지 문화연립주택 자리이다. 지금은 사라졌지만 창동의 옹기집은 증평에서 가장 오래된 옹기집이었다 한다.
전통지명이 점촌인 창동은 행정의 중심지이며 도시민의 주거지역이자 증평 중심 상권지로 변모하였다. 증평의 주거혁명이라면 과할까?
![신동리](/images/jp/sub02/sub02_06_01_img03.jpg)
증평지역에서 주공아파트가 1호로 들어선 곳이 창동이며 증평군청과 증평읍사무소가 소재하고 있는 곳도 이곳 창동이다.
증평읍 시가지를 관통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신동리와 접경을 이루는 창동리 도로가는 현대식 건물이 빼곡하여 증평의 중심상권임을 보여준다. 그 뒤로는 일반주거지역으로 오래된 집들과 함께 아파트며 다세대주택, 고급스럽게 지은 일반 주택들이 동네를 이루고 있으며 창동의 보강천변은 36국도가 지나고 있다.